인간은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e)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말과 함께 인간의 사회적인 본성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가정에서부터 부락이나 도시 또는 국가, 나아가 세계라는 사회체제 아래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이 보편타당한 진리인 천륜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人道를 논하는 것도 결국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기 때문에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끌어가는 교육에 있어서도 사회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역사는 결국 사회의 발전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인 특성이 교육의 양상을 결정하는 것이나 교육의 질과 양이 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학교의 교육목표를 설정함에 있어 현대 사회의 특징을 밝히고 거기에서 교육받을 사람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지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가. 복잡하고 불안한 현대 소비사회
현대 세계는 급속한 발전 가운데 많은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안과 위기 의식을 조성하는 사회이다. "현대인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잘못된 현실진단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위기의식은 바로 교육의 위기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고도로 산업화되고 정보사회화되고 지식산업화가 촉진됨으로써 객관성·실증성·가치중심성으로 발전하게 되고 따라서 탈가치화되고 物象化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비인간화되면서 탈도덕화되고 가치절대주의는 의미를 상실해 간다. 여기에 인간 실존의 총체적 위기로 나아가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근원하는 교육위기의 발생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사회와 교육의 밀접한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현시대의 사회를 진단하고 가톨릭의 교육이념으로 올바른 교육목표를 설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의 특징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에 따르는 교육의 기본 자세와 방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천륜과 인륜이라는 보편타당하면서도 다양한 진리의 초월성을 근거로 하여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 양성"이라는 목표 다음에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 양성"을 목표로 설정했다면 사회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이러한 위기적 증후에 대하여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현대 세계의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묘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오늘 인류는 그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이 시대는 심각하고도 신속한 변화가 점차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이다.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이 변혁들이 이제는 인간 자체를 변혁시키게 되었다.
개인과 집단의 판단과 욕망, 사물과 인간에 대한 사고 방식과 행동 태도에까지 이런 변혁이 반영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사회적 내지 문화적 참된 변혁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은 또한 종교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成長의 어떠한 위기에서나 마찬가지로 이런 변혁에도 중대한 난관이 수반된다. 예컨대,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크게 확대하면서도 그 능력을 언제나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한다.
또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데를 파고 들면서도 제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
사회생활의 법규를 점차로 보다 명백히 발견하면서도 사회생활의 방향을 제시하기는 주저한다."
이처럼 인간이 중심이 되면서도 그 인간은 내적 자아성찰이 결여된 상태에서 확신없이 표류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모순된 사회현상을 초래할 뿐이다. 이를테면 "인류가 오늘과 같은 財貨와 능력과 경쟁력을누려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상당한 수는 아직도 기아와 빈곤에 신음하고 있으며 문맹자도 적지 않다.
인간이 오늘과 같이 강한 자유 의식을 가져 본 일도 일찍이 없었건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내지 심리적 노예화의 새로운 형태가 대두되고 있다. 세계는 필연적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종속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의식은 생생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힘의 대립으로 극도의 분열을 자아내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인종, 이념 등의 극심한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사상의 交流는 증대되고 있지만,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는 말마디 자체는 서로 다른 이념 속에서 아주 다른 뜻을 가진다. 현대 세계는 보다 완전한 현세 생활의 건설을 열심히 추구하지만 정신적 성장의 노력이 수반되지 못한다."
개인과 가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격적인 결함이나 욕구불만의 누적, 인구 증가를 염려하는 가족계획의 부작용, 경제 및 사회생활의 여러 조건들의 重壓, 세대차에서 생기는 난관, 무질서해지기 쉬운 남녀간의 관계 등이 가정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
또한, 보다 거시적인 국가 및 민족의 차원에서도 동일현상이 초래된다. 민족과 국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러 종족들 사이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계층 사이, 부강한 민족과 빈약한 민족 사이, 세계평화를 도모하려는 의욕에서 여러 국가들의 협력으로 만들어 놓은 갖가지 국제기구들조차 자기 국가의 이익 추구나 정치적인 세력 확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갈수록 늘어나는 문화, 예술, 경제, 정치, 군사적 유대관계가 모든 민족과 국가의 조화와 안정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집단들 사이의 이기심을 북돋우며 갈등과 불균형이 자리잡는 복잡한 상황을 유발시킨다.
뿐만 아니라 현대는 소비의 시대이다. 생산방식은 대량생산체제로 바뀌었고 상품의 대량생산은 곧 상품의 대중화를 이룩하였다. 이전에 신분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이제는 대량 생산됨으로써 현대 생활의 필수품으로 대중화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제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은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얼마만큼 소비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소비능력이 사회적 신분의 기준이자 척도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생산체제는 지속적 소비를 위하여 욕구를 자극하고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동시에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신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인위적 욕구의 차이가 불투명해져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욕망인지를 알 수 없는 지금의 현상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 산업기술사회의 복잡성과 이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로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발견해야 하는가를 알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현대의 새로운 기술이나 발전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러한 혼란상태는 교육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러한 현대 사회의 질병들을 치료 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사물의 현재 진행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하여 과학기술문명의 특성을 좀더 고찰해야할 것이다.
나. 과학기술 산업사회
그렇다면 오늘날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회현실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오늘의 정신적 동요와 생활조건의 변화는 보다 광범한 변혁에 직결되어 있다. 정신 교육에 있어서는 수학과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이 더욱 중요시되고 실천면에 있어서는 과학의 소산인 기술이 날로 더욱 중요시되어 가고 있다. 이런 과학적 정신이 과거와는 다른 문화 형태와 사고방식을 낳아 주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지구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우주정복을 시도하게 되었다." 결국 과거의 단순소박한 생활형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도의 과학기술문명이 우리의 사회를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 되고 또 이러한 과학기술에 인간의 정신과 생활이 적응해 나가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절감하고 많은 업무를 기계화했을 뿐만 아니라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시간과 장소의 범주를 자신의 영향력 안에 어느 정도 끌어들였다.
이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시킨 것이다.
인간은 역사의 지식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推定技術과 계획설계로 미래를 지배하게 되었다. 현대의 발달된 생물학, 심리학, 인간학, 사회학 등은 인간이 자신을 깊이 인식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인류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므로 이미 여러 지역의 여러 가지 文化圈이나 歷史圈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인류는 이제 靜的 세계관에서 動的 혹은 발전적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여기서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종합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방대하게 야기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모두 과학기술 문명과 더불어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산업사회의 결과라 할 것이다.
산업사회의 공업화 형태는 전통적인 가족사회 및 부족사회의 모습을 흐리게 하면서 점차로 확대되어 현대 사회 특유의 집단화, 도시화를 형성한다.
이러한 변화의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어떤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는 동시에 수세기 동안 계속된 사회생활의 개념과 조건을 완전히 변질시키는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시골 마을과 농촌 인구가 줄고 도시와 도시인이 증가하며 심각한 이농현상을 유발시킨다.
그래서 풍요와 안락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 쉬운 도시의 매력은 과학기술문명의 집중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그 매력은 더욱 증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은 농촌에까지도 도시 생활의 장단점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기도 하였다. 특히, 후기 산업사회의 정보 및 지식 산업의 발달은 우리 삶의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이미 대중화된 컴퓨터의 폭넓은 활용과 농업·공업·상업 등 각 분야의 응용 프로그램 개발은 이미 농촌과 도시의 구별이 없이 어디에서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업무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한다.
아울러 신문과 방송 또는 각종 인쇄물들을 통한 정보의 교환도 대단히 활발하여 사건 전달이나 학술교류는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그리고 예술적인 재능과 감정의 표현도 대중들 안에 쉽게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편리하고 신속한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자신이나 주변의 여러 가지 여건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생활 공간을 옮기게 되며, 거기서 자기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서로 생소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비슷한 사람끼리의 결속이 이루어져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변화되고 사회화의 욕구가 증가된다. 동시에 사회화(社會化=Socializatio) 자체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마땅한 인격의 成熟과 참된 인간관계(인간화=人間化=Personalizatio)를 촉진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進化는 이미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선진국에 있어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제 교육을 통하여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이고 공업화와 도시화의 혜택을 누리려고 희망하는 국가들은 산업사회의 혜택과 더불어 인간적인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과학기술에서는 조금 뒤떨어졌지만 옛 전통을 가진 백성들이 보다 성숙하고 보다 인격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회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발달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사회구조의 변화는 여러 가지 旣存價値들에 대한 논쟁을 일으킨다. 새로운 여건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아온 젊은이들에게 기존가치에 대한 논쟁은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며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못견디게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가끔 인내할 줄 모르고 불만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반발을 일으키는 수도 있다. 그들은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스스로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될 수만 있다면 속히 사회생활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이 때문에 부모나 교육자들은 자신들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날로 더 큰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사실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제도와 법규, 사고방식과 생활감정은 오늘날 일어나는 현실에 언제나 잘 맞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행동태도와 행동기준에 있어서 중대한 혼란이 야기된다. 이같은 새로운 사태는 드디어 종교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현대 세계가 이렇게 빨리 발전하며 또 때로는 무질서하게 변혁을 유도하게 됨에 따라 調和를 잃은 세계에 대한 의식이 날카롭게 느껴지며 사회생활에 있어 모순과 갈등을 낳게 된다. 인간 외적인 이런 요소들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어서도 현대적 실천이성과 이론적 사색 사이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균형이 생겨난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이론적 자기 지식의 총체를 지배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원만히 종합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댓가를 즉시 보상받기를 원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도 않는다. 실리적 노력과 도의심의 요구 사이에도 균형이 없고, 집단생활 조건과 개인의 思索生活, 특히 개인적 취미생활의 필수조건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는 수가 많다.
드디어 인간활동의 專門化와 사물의 전체적 展望 사이에도 불균형이 생긴다. 그 결과로 상호 불신과 반목과 분쟁의 불행이 생기며 인간 자신이 이런 불행의 원인인 동시에 祭物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피조물들에 대한 그 지배력을 날로 더욱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 강화해야 한다는 확신이 커져간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분배로써 자기 재산을 착취당했다는 의식이 강해졌고 그 재산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질서를 확립하여 인간에게 봉사하게 하고 개인과 집단이 본연의 존엄성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확신도 커져 갔다. 이에 따라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와 최근에 독립한 신생국가들은 정치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면에 있어서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려 하며, 세계 무대에서 스스로의 役을 자유로이 연출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더 빨리 발전하는 부강한 국가들과 저개발국 사이의 격차는 날로 커지기만 하고 前者에 대한 後者의 경제적 依存度는 높아만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아에 신음하는 백성들은 부유한 백성들을 향해 도움을 청한다. 남녀 동등권을 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보장받지 못한 지역에 있어서는 여성들이 동등권을 요구한다. 직공들과 농민들은 생계에 필요한 것을 얻을 뿐만 아니라 노동으로써 인격을 발전시키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생활 조직에도 참여하기를 요망한다. 이제야 비로소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명의 혜택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고루 베풀어질 수 있고 또 베풀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모든 백성이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요청 이면에는 보다 깊고 보다 보편적인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즉 개인이나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풍요롭고도 자유로운 생활, 다시 말해서 현대 세계가 사람들에게 풍부히 제공하는 온갖 가능성을 스스로도 이용할 수 있는 생활에 굶주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세계적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날로 더욱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 세계는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대의 선을 다할 수도 있고 최대의 악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사랑과 증오의 문이 동시에 열려 있다. 그러나 인간이 발굴한 힘들이 인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이런 힘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 "가톨릭 대학교는 현대 문화가 개인과 백성의 전반적 발전에 보다 적합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문화의 열망과 모순을 알아내고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적절한 탐구를 통하여 현대의 기계, 기술, 그리고 특히 대중매체가 사람들, 가정, 제도 및 현대 문화의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은 결국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학문과 예술이 뛰어나고 과학기술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 자신의 내부에 분열과 갈등의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현대 사회를 구원하는 길이며, 동시에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길이라 할 것이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 속에 뿌리박힌 보다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으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는 수도 흔히 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물질주의에 젖은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극적인 상황을 똑똑히 이해하기를 외면하고 혹 불행에 짓눌린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사물의 가지가지 해석 가운데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써만 참되고 완전한 인류 해방을 기대하며 미래에 지상에 건설될 인간 왕국이 자기 마음의 온갖 소망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확신을 가진다. 또 인생의 의의에 대해서 실망한 나머지 인생의 실존 자체는 고유한 의의라곤 도무지 없지만 인간의 재능만으로써 인생에 모든 가치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용감성을 찬미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의 현발전을 직시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막대한 代價를 치르고 획득한 승리는 또 무슨 소용이냐?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으며 또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지상 생활이 끝나면 무엇이 따를 것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과 갈등 또는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어떻게 이기심을 극복하고 불균형을 해소하는 일치와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성실한 일꾼의 마음가짐, 바로 봉사정신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 봉사(奉仕 : servire)란 말의 의미
봉사란 말을 국어사전의 의미로만 볼 때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노력함"이나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함 (무료봉사)"을 의미하지만 가톨릭교육의 차원에서는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봉사" 즉 "섬기다"(SERVIRE)라는 말은 성서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이 하느님에게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종속되는 것 즉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느님께 예속되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며, 이것은 사실상 진리에 순응하고 순리에 따라서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섬김은 불완전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며, 인간에게 크나큰 영광이 되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예속되는 것은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노예제도로서 이교도의 세계에 알려진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한 관행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무시당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섬김을 강요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봉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노예"나 "종"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는 굳이 노예나 종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며 섬기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헌신과 봉사에서 크나큰 행복감을 느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어사전의 의미대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여 노력"하거나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 즉 왕에 대한 충성이나 공식적인 직무에 대한 헌신,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배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보살핌(자선 사업) 등이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봉사활동이 바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시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이 섬기기를 거절하는 것을 원상태로 회복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님이시고 스승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면서 자신을 불태우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신의 생명을 내주러 왔다." 이렇게 가톨릭교육에서 이야기하는 봉사는 진리와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인간을 섬기는 자세, 따라서 어떠한 차별이나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당위성과 인간의 존엄성에 따른 섬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개념과 밀착되어 있으며, 이 사랑(AMARE)과 더불어 가톨릭의 근본정신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고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나. 가정과 봉사정신
이러한 인간 구원과 행복의 봉사정신이 인간 세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가정이다. 가정에서의 봉사는 새삼스럽게 "봉사"라는 말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상생활화되어 있다.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며 온갖 수고와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수행할 때 그것은 자기 아닌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노력하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부모의 도리와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그러한 노력에 따른 보람과 기쁨, 충만한 행복감이 찾아들기도 한다. 물론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는 서로가 남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헌신적인 보살핌도,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의 행위도 봉사라는 표현을 써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자기 욕심대로만 행동하지 않고 남의 뜻을 받들어 섬기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우지 못한다면 국가나 사회를 위한 헌신봉사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가정 안에서 봉사의 기본적인 의미와 실천이 수행되어야 사회의 봉사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는 미숙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실천할 수 없다. 가정 안에서도 미숙한 어린이들은 흔히 자기 욕심대로 행동할 뿐이고 올바른 봉사를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인 부모나 아니면 적어도 어느 정도 철이든 형제들에게서 서로 사심없이 서로를 위해 돌보아 주고 일해 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봉사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인간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자신이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가정 안에서 어리고 미숙한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는 부모의 사랑과 봉사는 비교적 단순하고 뛰어난 능력과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나 국가 또는 세계를 무대로 광범하게 활동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정교육에 이어서 사회에 진출하여 올바른 인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학교교육이라면 학교에서 올바른 봉사정신을 심어주고 봉사를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은 봉사생활을 해야 하는가? 앞에서 말한 봉사의 종교적인 의미, 즉 인간이 창조주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그 분을 섬기고 그 분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자기 존재의 참된 보람과 가치를 깨닫고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속적인 차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로 간단히 대답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인간의 존재 자체와 삶의 체험을 통해서 또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봉사가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인간의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인간 사회에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이든 종교나 철학의 가르침이든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현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교육에 있어서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 양성을 두 번째 교육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첫 번째 교육목표인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 양성이라는 내용과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숙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 올바른 봉사를 할 수 있다면 천륜과 인도를 아는 지성인이란 바로 성숙한 인간성을 제대로 받아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인격자를 뜻하기 때문에 이 인격자는 자신의 성숙한 품성과 덕성을 드러내는 봉사활동에 필연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완전한 존재인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고 구원하는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가정 안에서도 성숙한 어른인 부모가 미숙한 자녀들에게 갖가지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통해서 자신과 자녀들의 행복을 지켜나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대학교육에 있어서도 가정의 중요성을 크게 의식하며 학생들의 각 가정과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가정과 관련된 단과대학이나 학과, 연구소 등의 조직을 마련하고 있다.
다. 현대 사회와 봉사
불안정하고 갖가지 문제의식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본능적인 욕구 충족과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어디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를 느끼며 행복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지 찾는 것은 지성적인 인간의 당연한 과제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 사회에는 일찍부터 자신의 이기심이나 욕구 충족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고 세계의 평화와 우주질서에 헌신함으로써 참된 가치와 행복감을 느끼는 실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부각된 봉사의 의미가 사회생활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육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구체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봉사라는 말 자체가 일치와 사랑을 전제하면서 구체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면 현대 세계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정신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아무리 많이 열거하더라도 그들의 힘과 예술적인 재능 또는 과학기술보다는 단순, 소박한 봉사정신이 더욱 현대 사회에 구원의 빛을 던져주지 않는가?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정신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마더 데레사 같은 분이 바로 봉사자의 모델로서 사회구원의 큰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사"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인류 구원의 메시지와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봉사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왔다."("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르 10,45)는 성경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인류는 자신의 발명과 자신의 능력을 경탄하면서도 세계 발전의 현상,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개인 노력과 집단 노력의 의의, 사물과 인간의 궁극 목적 등에 관한 안타까운 문제들로 자주 번민하게 된다....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겠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겠다.
따라서 인간 전체, 영혼과 육신, 마음과 양심, 지성과 의지의 결합체인 인간이 우리 논술의 중심 테마가 될 것이다....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고, 판단하기보다는 구원하며, 봉사를 받기보다는 봉사하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려는 것 뿐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생활공간에서 살아가며 지역 공동체에 관심을 가질 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상이며, 가장 소망스러운 미래지향적 가치관이다. 인간성의 상실과 도덕성의 붕괴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가 만연할 때 발생한다.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기본 책무이다. 봉사정신의 생활화는 자발성을 그 기초로 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책무를 이행하는 데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자발적 봉사활동은 우선 자아실현이 그 핵심적 특성이다.
봉사활동을 통하여 개인은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자각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봉사하는 경험을 가짐으로써 인격적 성장을 체험하고 동시에 잠재적 능력을 실현하는 기회를 가진다. 또한, 봉사활동은 자신의 의사로 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이며 자주적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의무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자원봉사라 할 수 없다. 나아가 자원봉사활동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가치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이타적이다. 쉬바이쩌 박사의 아프리카 생활과 생명경외 사상은 그 대표적 본보기이다. 더욱이 사회봉사는 자기만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해 바른 공동체 사회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공동체적이다.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려는 자는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우선 진실되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봉사활동을 함에 있어 커다란 대의명분보다는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주변의 일을 소신껏 행하는 것이 좋다. 자원봉사활동은 그 성과가 화려하거나 빛나는 일이 아니므로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소리없이 행하는 이러한 활동들은 공동체를 움직이고 지탱하며 그 미래를 밝히는 위대한 힘이다. 대학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대학이 지역 공동체를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학의 사회봉사가 필요한 이유는 대학이 모든 것을 확고하게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 실천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사회 현장에서의 실천을 통한 학습과 자기훈련 및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익히도록 하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통해 봉사정신이 습관화됨으로써 단순히 학습에 머문 도덕심은 내면화될 수 있다. 더욱이 대학은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학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쓰이지 않은 인간자원을 조직화할 수 있는 지도자 배출의 역할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지역봉사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공동체 정신을 개발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봉사정신의 생활화를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성서의 가르침은 곧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교훈("amare")이자 교육이념이다. 대학의 조직으로 인성교양부를 두고 "사랑과 봉사"를 가르치는 교과목들을 개설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회 봉사기관에서 자발적인 현장체험을 하도록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은 앎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보편적 가치를 배우고 생활화하는 것은 자신을 뜻있게 하고, 사회를 빛나게 하며 나아가 국가를 강하게 한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어두운 그늘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취적 정신으로 학문 탐구에 전력을 다하면서도 이웃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다하여 도와야 한다. 봉사는 남을 돕는 것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돕는 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길러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유지발전하게 하고 나아가 인류평화 건설에 기여하게 한다."는 대한민국 교육목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 현대 사회의 봉사와 탐구정신
과학 발달에 기초한 산업사회의 현실은 사회영역 전반에서의 과학적 지식체계를 外延化시킨다. 이를테면 "산업사회에 있어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변동과 관련된 도구적인 또는 수단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의 현실규정에 있어서도 많은 의미를 지닌다. 산업화는 전문화에 따른 노동의 분화 및 기술적 합리화를 가속시키며, 사회적 현실의 복잡성의 수준을 높여주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視角에 따라 多樣한 관점들이 나타나며 진리에 대한 애매모호성과 불확실성의 영역은 더욱 확대된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불가능성이나 불가피성이 현실적으로 否認되는 한편으로 과학적 지식의 認知的 지위 변화에 기인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과학화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탐구적인 자세의 확립이 필요하다.
묻고 답하는 탐구자적 자세는 앎의 원천이자 인류문화의 토대이다. 인간은 지성적인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하여 끝없는 의문을 던지며 인식의 차원과 범위를 넓혀 나간다. 성경의 창조 설화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도 결국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동질하여 빚어진 것으로 묘사될 만큼 인간의 탐구적 자세는 본성적인 것이다. 또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완전한 행복이 하느님을 알고 누리는 至福直觀(visio beatifica)에 있다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신학대전에서 설명하는 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탐색과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다. 더구나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발전함에 따라서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상도 달라진다면 그러한 변화에 따라서 적응해 갈 수 있는 연구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요소라고 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교육에 있어서도 현시대의 요구에 맞는 진리 추구의 자세가 필요하다.
탐구자는 참된 진리 획득을 목적으로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는 진리 자체만을 추구하는 까닭에 맹목적인 힘의 논리, 광신적인 믿음, 정치적 이념, 전통적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탐구자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바른 지성과 합리적 이성의 권위이다. 이성과 양심은 기존의 신념이나 통념, 일반적인 학설이나 상식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과거의 것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 미지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은 새로운 지식 산출의 원동력이고 교육의 핵심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이러한 탐색과 연구활동은 끝없이 이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특히 격변하는 현대 기술문명의 사회상황 아래에서는 인간의 지성과 과학의 명료성이 "애매모호한 혼돈과 불확실성의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더욱 진지한 탐구자적 자세가 요청된다. 진리를 탐구하는 이론과 원리는 본질적으로 반증될 수 있는 까닭에 언제나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탐구자적 자세는 특정한 사회 안에서 영구불변한 진리의 소유를 오만하게 주장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토대를 언제나 어디서나 새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열린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탐구정신을 통하여 우리는 창조적 삶을 이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서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며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성장, 발전, 쇠퇴해가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도 바람직한 인간,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교육에 있어서 이 탐구자세, 특히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소속된 사회나 집단에 대한 탐구자세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흔히 한 사회 안에서 기존신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진리 추구는 기존의 진리로 인식되는 것 그 자체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가 있다.
일반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사회통념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의 진리 체계 아래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때로는 참된 진리를 왜곡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구자는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서 진리를 수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진리는 실천을 통해 실현되고 실천은 진리를 좇아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유스띠노 신학교의 정신도 바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유스띠노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사실 진리를 수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용기는 탐구자의 기본 덕목이며, 그 이상적인 표본이 순교자 정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과 순교정신의 관계도 또한 밀접하다 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톨릭 대학교 내에서의 탐구가 "인식의 통합에 대한 모색, 신앙과 이성과의 대화, 도덕적 관심, 그리고 신학적 전망"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 물음과 진지한 사색, 새로운 앎의 추구와 진리증거의 용기를 뜻하는 탐구자적 자세의 확립을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진리의 실천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한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묶이지 않고 항상 진리를 추구하며, 이를 통하여 삶을 혁신하려는 탐구자적 자세는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 사회봉사에 필요한 자질과 능력계발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학기술의 산업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매사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실 인간은 과학적 태도와 합리적 사고방식을 통하여 오늘날의 기술문명사회를 이룩하였다. 인간이 무지와 폭력, 또는 미신이나 주술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여러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과 기술의 진보 덕택이다. 우리는 삶의 영역이나 학문의 영역에서 항상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어떠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새로운 상황과 문제점이 전통적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기존의 지식체계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과학적 방법이란 권위나 미신 또는 타성에 의존하지 않고 관찰과 실험 또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추론을 통해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에 도달하는 절차를 말한다. 과학적 문제 해결 방식은 그 대상과 절차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선 가장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것은 믿음을 통한 이해로서 모든 학문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公理나 계시진리에 관한 내용들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믿음의 바탕이 없다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모순율(principium contradictionis)과 인과율(principium causalitatis)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주관주의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확실성의 원리로써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그 자신은 바로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의 바탕("cogito ergo sum")을 이야기한 것도 바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믿음과 이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이해하기 위하여 믿고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crede ut intelligam, intellige ut credas)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이다. 다음으로는 어떤 사실이나 문제들을 그것이 관련되어 있는 보편적 규칙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모든 사실들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검토하며, 그 내재적인 법칙과 변화에 따르는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해설하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이다. 흔히 사물이나 구체적인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방법은 관찰, 측정, 실험, 검증, 이론적 체계화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개별성이나 특수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법칙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나 미래의 사건에 대한 가능성을 예측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대체로 일회적 성격을 띠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 법칙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정신과학적 해결 방식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체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역사 속에 표현되는 가치를 기술하는 정신과학의 방법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초월적 진리도 이러한 정신과학의 산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방법과 정신과학적인 방법을 모두 활용하여 지성의 한계와 심연을 건너뛰는 또 다른 과학적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 해결 방식은 - 그것이 초월적인 것이든 자연과학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과학적인 것이든 합리적인 체계를 갖춘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한 -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보편타당한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과 절차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학적 방법은 우선 '주어진 사실'에서 출발한다. 믿음의 과학적 방법은 초자연적 실재를, 자연과학적 방법은 '자연현상'을, 정신과학적 방법은 '역사적 사건'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 이 현상과 사건 또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반적 원리로 환원시킨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은 과정과 절차의 합리성을 전제한다.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며 아울러 독단론과 회의론도 피해야 한다. 우리가 유한한 인간 이성과 나약한 믿음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진리는 현실적으로 절대적인 차원에까지 이른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어떠한 독단론도 참된 진리를 획득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또한,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일반적 합의를 포기하고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는 안이한 이론으로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회의론 역시 극복되어야 한다. 비록 인간의 지식이 부족하고 끝없는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것이라도 우리는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과 갖가지 기술문명 사회의 결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기 위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일반적인 학습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을 응용하며, 현대 사회의 필수품이 된 컴퓨터, 자동차와 관련된 공과대학을 새롭게 시작하여 현대 사회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요구한다면 언제나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개발하여 인류와 사회에 대한 봉사에 임하고자 한다.
"사회의 속성을 구조, 기능, 통합, 안정, 균형 유지로 파악하는 기능주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현대 사회는 업적 사회이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적 역할은 귀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취성에 의존한다. 즉 업적 사회는 특권 및 세습적 신분보다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대부분의 직업지위를 채우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인력과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산업화, 근대화에 따른 계속적인 역할의 분화는 새로운 전문직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 의해 지배된다. 셋째,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가. 현대 사회의 전문인
현대 사회는 수많은 영역과 전문 분야로 나뉘어진 복잡한 사회이다. 과거의 전통사회에서 한 사람이 담당하였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여러 사람의 공동작업이나 여러 집단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의 분화 현상에 따라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분야는 그만큼 좁아진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사회 각 분야의 유기적 연관성이 더욱 증대되고 절실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공동체 내에서 자기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전문지식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이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고 자신의 직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전통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으나 각 영역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선 자신이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고상하고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부귀와 명예를 가져오는 일이라도 자신의 적성과 자질을 고려하지 않고 직업을 선택하면 보람을 느낄 수 없다. "좋은 노동"은 부와 소유를 가져다줄 지 모르지만, 진정한 보람과 의미를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소명의식을 느낄 수 있는 "가치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재주나 능력을 습득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흔히 전문인이라고 하면 특정한 분야의 깊은 지식과 기술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재주나 능력만으로 전문인이 될 때에는 오래가지 못한다.
참으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전문적인 기술과 능력을 지니고 하나의 직업을 소명의식으로 받아들일 때, 그 직업은 단순한 개인의 일을 넘어서서 인간 사회의 공동 연대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고리가 된다. 오늘날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의 전환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가치변동은 점차 물질적 가치보다는 안정, 소속감, 보람, 자기 실현과 같은 비물질적 가치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둔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랑하는 태도는 현대 사회의 전문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일"을 하며, 삶을 즐길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하며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키워나갈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또한, 자신의 일을 행함에 있어 필요한 전문가적 지식과 기술 및 정의로운 직업윤리를 갖추게 하는 것을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는다.
성경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이 전해 주듯이 행복과 평화는 사랑과 정의가 깃들이는 곳에 있으며, 정의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일을 행하는 데"서 비롯한다.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자기의 취미나 특기를 살리면서 자신의 일로 전문적인 분야를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갈 때 각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발전에의 기여
우리가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사회에서 전문인으로서의 균형잡힌 인격형성이 이루어지고 자신이 바라는 자아를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뛰어난 전문지식과 기술은 사회에 대한 봉사보다 인간 사회에 더욱 큰 불행과 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완성된 인격체로 성장하기까지 상당한 기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미완성의 존재이다. 인간은 신체구조의 측면에서는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보다 강한 동물들과 생명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인간의 유일한 강점은 이성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성과 언어를 수단으로 자연과 타인과 소통하며 주변 세계를 파악하고 활용한다. 이성과 언어를 통해 서서히 하나의 주체로 성장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판단과 의지의 중심인 이성이 없다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없고, 사회의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적인 생활방식과 사회의 여건을 조화시키며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삶을 영위하는 전문인이라야 인류문명과 문화에 기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합리화 내지 知性化 또는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未分化 전통사회에서 인간은 지금보다 빨리 성장하였다. 습득하고 개발해야 할 지식이나 기술의 양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느리게 발전하였기 때문에 교육은 삶의 일정기간 동안에만 실행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학창시절에만 교육받는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복잡하게 분화되었고 전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속도로 변화하는 까닭에 교육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평생교육, 지속적인 학습사회의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과거에는 지리적인 여건과 교통수단의 제한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가치를 접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삶의 변화가 적은 생활을 영위해 왔지만, 이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현실이다. 사회가 급변하면 할수록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인격적인 주체의식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현대의 풍요로운 사회가 아무리 다양한 물품과 가치들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선택하는 것은 인격적인 주체의 몫이다. 아무리 정보가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대신해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느끼고 행동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며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변하기를 멈추고 밀려오는 정보의 물결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결코 하나의 전문인으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 변동의 시대에 맞추어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전문인으로서의 자기 계발과 혁신을 고취하는 것을 주요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는다. 이러한 목표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 가운데 하나로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에 부응하는 최첨단 기술과 지식을 도입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인들을 양성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서 우선 자동차 분야와 전산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통하여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길이며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때와 장소가 요청하는 전문적인 학문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교육내용과 방법을 개편하고 향상시킴으로써 대학인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을, 사회인에게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재교육을 통한 자기 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대구가톨릭대학교는 평생교육원을 신설하고 끊임없는 지역사회개발, 사회교육, 각계각층의 성인교양교육과 전문 분야의 지속적인 교육도 시행하고 있다.
다.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과 전문인의 역할
인격적인 자아실현을 이루는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성숙과 자기 계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력을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전문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전문적인 기술과 능력이 공동작업을 벌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 사회이다. 여기서 전문인은 특정 분야에서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을 말한다. 사회가 갈수록 더욱 분화됨에 따라 전문 분야도 그만큼 세분되어 간다. 그런데 흔히 전문가들이라고 하면 자기 분야에서는 뛰어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무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무 쓸모없는 전문가라는 말이 생길 수도 있다. 전문가의 영향력은 아무리 특정한 영역에 한정된 지식이나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에 적용되면 인간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는 전문적 능력만을 갖추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공동작업의 바탕이 되는 책임의식과 공동선을 위한 폭넓은 교양을 지녀야 한다. 전문적 지식의 사용은 타인과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는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종합적 판단력과 상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종합적 판단력은 자신의 일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사실 전문가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자기 역할을 살펴보고, 자기 개인의 관점에서 사회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책임감과 판단력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요청되는 것이지만 전문적인 영역으로 세분화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절실한 덕목이다. 인간 행위는 타인이나 사회와 밀접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주어진 사회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맥락에 합당한 역할을 다해야 한다.
특히, 기술적 전문가들은 사회적인 책임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뛰어난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가 중립적이라고 하며 그 기술과 지식의 사용으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윤리·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기술이 인간 생활이나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기보다 항상 기술의 발전과 효과만을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메마르고 몰인정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연 생태계의 위기를 몰고 왔으며 미래의 세계에 대한 심각한 불안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는 높은 학식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 책임과 판단력의 결핍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전문가들에게는 전문지식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칠 수 있는 책임과 판단력의 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여기서 교양이란 하느님, 인간, 사회, 국가, 자연, 기술 등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이루어질 때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이 빛을 발하게 되고 사회에 참다운 기여를 하게 된다. 기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복한 삶을 이루는 데 있다. 전문가들의 역할이 단순한 기술개발이나 활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안에서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 즉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가 전문가로서만 머물고 기술이 기술적으로만 사용되는 데 머무른다면 그러한 전문가는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을 상실하고 수단에만 매달려 있는 불행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에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전문적 능력과 더불어 종합적 판단력 및 책임감을 지닌 인재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한다.
책임과 판단력은 앎의 문제이기보다는 실천의 문제이다. 사회에 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편적 앎을 넘어서 매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히 전문적 지식의 양을 늘린다고 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폭넓은 교양과 구체적 삶을 통해 실천하는 봉사생활의 체험을 중요시한다. 전문적 지식이 잘못 사용되어 인류사회에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대구가톨릭대학교는 단순한 기술 본위의 전문가가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가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교육목표는 "자유를 사랑하고 책임을 존중하며 신의와 협동과 애경의 정신으로 조화있는 사회생활을 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